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릴레오 갈릴레이 (문단 편집) == 에피소드 == [[파도바]]에서 생활하던 무렵, 갈릴레오는 '''마리나 감비나'''라는 여인을 만나 1남 2녀를 낳았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집을 구해주고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뿐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갈릴레오가 전통적인 결혼 및 가족 제도에 대해 큰 저항을 느꼈다거나, 혹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봐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고 버린거나 다름없다는 등이다.] 결국 1610년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떠날 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두 딸은 피렌체 근처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살아서는 떠날 수 없는[* 오늘날도 봉쇄[[수도원]]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이 불가능하다. 물론 [[수도자]]를 그만두고 퇴회하는 것은 자유이다.] 봉쇄수녀원이었다.[* 갈릴레오의 딸들은 [[수녀원]]에 보내질 당시 12세, 13세였는데 이는 수녀원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오늘날은 대개 만 18세 이상에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하지만 갈릴레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규칙을 무시하고 들여보냈다. --역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빽이 중요한 거다-- ] 아들인 '''빈첸초 갈릴레이'''는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갈릴레오는 빈첸초의 교육비를 부담하고 결혼 후 신혼집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경제적 의무는 다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큰딸 '''비르지니아 갈릴레이'''는 [[수녀원]] 생활에 잘 적응했지만, 작은딸 '''리비아 갈릴레이'''는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종종 정신적 & 육체적인 발작을 보이곤 했다. 이에 대해 비르지니아와 갈릴레오 부녀가 주고받은 편지 여러 통이 지금까지 보존되었고, 이를 토대로 연구한 《갈릴레오의 딸》이라는 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망원경을 접한 갈릴레오는 [[파도바]]로 돌아오자마자 3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고, 곧 그것을 개량하여 8배율 망원경으로 진척시켰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로원 의원들을 초대하여 망원경의 효율을 설명했고, 이에 감동한 원로원은 많은 선물과 함께 갈릴레오의 교수 연봉을 2배 인상했다. 하지만 이미 망원경은 몇몇 유럽 국가에서 활용되는 상황이었다. 원로원은 나중에 이를 알고는 인상된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고, 갈릴레오의 월급이 앞으로도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다. 늘그막인 1638년에는 당시 30세의 젊은이였고, 훗날 《[[실락원]]》을 쓴 [[잉글랜드 왕국]]의 시인 [[존 밀턴]]이 그를 찾아 방문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